2008년 12월 9일 화요일

감추기 -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의 단상

Roland Barthes

 

 

감추기(cacher):

심의적(deliberatif)인 문형.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해야 할지 어떨지를 자문하는 게 아니라(이
것은 고백의 문형이 아니다), 그의 정념의 혼란을(그 소용돌이를) 어느
정도로 감추어야 할지를 자문한다. 그 욕망, 그 절망감, 그 지나침(라신
의 용어로 광란fureur이라는 것)을.


X가 나를 두고 바캉스를 떠나더니 전혀 소식이 없다. 무슨 사고가 일
어난 걸까? 우체국이 파업중일까? 아니면 무관심, 거리감을 두려는 전
략, 순간적인 충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그는 젊음에
취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또는 단순히 아무 일도 아닌 걸까?

나는 점점 더 괴로워하며 기다림이란 시나리오의 모든 막을 거친다.
하지만 X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서 다시 나타난다면(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물론 이 생각은 모든 고뇌를 즉시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
겠지만),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내 혼란을(그때는 이미 끝난) 감춰야 할까?("좀 어떠세요?")아니면 그
것을 공격적으로("그 처사는 옳지 못했어요. 당신은 ~할 수도있었을 텐
데") 또는 열정적으로("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터뜨려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람을 진력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 혼란을 넌지시 슬쩍
비춰야만 할까("좀 불안했어요")? 내 첫번째 고뇌에다 어떤 선전 문구
를 택해야 할까 하는 두번째 고뇌가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이중의 담론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
이 그 고유의 구조적 성향으로 인해 나의 간청을 필요로 한다면, 내 '
정념(passion)'의 서정적 진술에, 문자 그대로의 표현에 자신을 내맡기
는 게 나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닐까? 지나침, 광기, 그것이 내 진실이
며 힘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진실, 이 힘이 결국에 가서는 그를 감동시
키는 게 아닐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정념의 기호들이 그를 질
식시킬지도 몰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바 로 내 가 그 를 사 랑 하 기 때 문 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를 이중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때로는 대상으로, 때로는 주체로. 나는 독재와 봉헌 사이에
서 망설이며, 그렇게 하여 자신을 공갈협박 속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기를 바랄 의무가 있고, 그
러나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함정이다. 나는 성
인이 되거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인은 될 수 없고, 괴물
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얼버무린다. 나는 내 정념을 조
금 만 보여준다.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
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
뜨려서는 안 된다."(클로틸드 드 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인 파즈 대위는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을 죽도
록 사랑하나,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마치 자기에게 정부
가 있다는 듯 꾸며댄다.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
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 가 당 신 에 게 뭔 가 감 추 는 중 이 라 는 걸 좀 아 세
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
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
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내가 보내
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라르바투스 프로데오(Larvatus prodeo)-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내 정념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나,
또한 은밀한(엉큼한) 손길로 이 가면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정념은 결
국에 가서는 그 관객을 가지게 마련이다. 죽기 바로 직전 파즈 대위는
그가 침묵 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마지막 극적 사건이 없는 사랑의 봉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는
항상 승리자이다.

그 사람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울었다고 가정해
보자(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랑하는 육체의 정상적인 활동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안 보이려고 내 뿌예진[이것은 부인(부인)의 좋은 사
례이다. 보이지 않으려고 시선을 흐리게 하는 것] 눈에 검은 안경을 썼
다고 하자.

이 몸짓의 의도는 계산된 것이다. 나는 모순된 동시에, 금욕주의적인
'의젓함'의 그 도덕적 이득을 취하려 하며(나는 자신을 클로틸드 드
보로 간주한다), 또 그의 다정한 질문("무슨 일이오?")을 유발하고자
한다.

나는 가련한 동시에 감탄할 만한, 아이이자 어른이고 싶어한다. 그러
나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일종의 도박을 하는 셈이며, 자신을 위태롭
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 별난 안경에 대해 전혀 물어보지 않
을 수도, 또 그 사실에서 어떤 기호도 알아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
이다.


나는 내 감정의 지나침을 결코 말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고뇌의
침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나는, 그러므로 그 고뇌가 지나가
면,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안심할 수가 있다. 언어
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특히 말 하 지 않
는 것 조 차 도.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육 체
로 는 그 렇 게 할 수 없 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육체는 조종할 수 없다
.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
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육체는
고집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

이렇게 하여 일련의 긴 언술적인 긴장이("나의 예의바름이") 갑자기
일반적인 증세로 폭발할수도 있다. 그 사람의 어리둥절해 하는 시선
앞에서 별안간 울음이 터져나와(예를 들면), 오랫동안 감시해왔던 언어
의 노력을(그리고 그 효과를) 무산시켜 버린다. 나는 무너진다. 그렇다
면 너는 페드르가 누구인지 그녀의 광란이 어더한지 모두 알아두어라.

#검은 안경(63-67.p)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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