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스포츠단체장의 자리싸움은 왜 뜨거울까?

  씨름협회장의 자리도 그러했고

  KBO 총재의 자리도 그러하다.

 

  국민들은 시민들은 개인들은 자리싸움을 보기만 한다. 멀뚱하니...

  다른 고민할 것도 많으니 그냥 욕하며 보고 있을 수 밖에...

 

  아래의 박동희기자도 현상만 이야기할 뿐 갈등구조를 일으킨 알맹이는 언급하지 않는다.

  무엇을 먹으려 그들은 박터지게 갈등하는가를

  까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귤먹어보라고 던져놓고 귤을 까주진 않는다.

  먹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까먹으라는 것인가?

  개인들은 지금은 사과를 먹고 내일은 배를 먹어야 하기 때문에

  귤을 까주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그래서 대놓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스포츠가 협회장후보들에게 주는 것은 무얼까?

 

 

 

 

 

===============================================================================

 

[박동희의 베이스볼포엠] KBO 총재를 둘러싼 매직아워   http://blog.naver.com/dhp1225 

기사입력 2008-12-23 17:39

 

태양이 사라진 뒤 어둠이 내릴 때까지의 짧은 순간.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찰나. 그것이 바로 매직아워의 뜻이다. 사진으로 보이는 대구구장의 대기가 매직아워다(사진=삼성)

‘매직아워(The Magic Hour)’란 영화가 있다. 일본 코미디 영화다.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의 이름은 빙고다. 야쿠자 보스가 운영하는 바(Bar) 지배인이다. 욕심이 지나쳐 보스의 여자까지 지배했다. 보스가 모를 리 없었다. 빙고와 여자를 죽이려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빙고가 제안했다. “전설의 킬러, 데라 도가시를 데려 오겠다”고.

데라를 만나는 게 꿈이었던 보스가 수락했다. 기한은 5일. 그러나 빙고는 데라가 누군지 몰랐다. 고육지책으로 무명 배우 무라타를 꼭두각시로 내세웠다.  “살인청부업자가 주인공인 애드립 영화”라고 속였다. 카메라는 숨겨져 있다고 거짓말했다.

상대가 진짜 야쿠자라는 걸 모르는 무라타는 혼신을 다했다. 20년만의 첫 주인공이었다. 연기는 훌륭했다. 반신반의하던 보스도 믿었다. 하지만 진짜 데라가 출현했다. 일이 꼬였다. 가짜의 정체가 밝혀졌다. 진짜 킬러의 역습이 시작되고. 주인공들은 위기에 몰린다.

근래 매직아워를 다시 봤다. 이유가 있다. 야구판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인선을 놓고 말들이 많다. 이사회에서 선출한 총재 후보를 문화관광체육부에서 딴지를 걸었단다. 낙하산 총재가 투입될 예정이란다. 구(舊)정치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야구판의 무라타가 등장할 모양이다. 스스로를 은밀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착각한 무라타처럼 자신을 야구의 구원자로 오인한 이가 나올 태세다. 어쩌면 비낙하산 출신보다 일을 잘 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짜 데라는 결국 정체가 탄로 났다. 낙하산 총재의 미래도 뻔하다. 전임 총재가 교훈이다.

아, 매직아워를 다시 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요즘 야구판 얘기와 견줘 어느 게 재미난 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각본대로 되지 않은 이야기들

지난 8월 베이징올림픽. 신상우 전 총재의 거취가 주목됐다. 올림픽이 끝나는 데로 물러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언론과의 비공개모임에서 약속했다. 후임자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모 전 의원이 유력했다. 하지만 어물쩍댔다.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끝나면 사임하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지난해 JU그룹 관련 수재 의혹에서 살아남았던 그다. 그러나 전 KTF 사장으로부터 법인카드를 받고 장남의 인사청탁 의혹을 사며 낙마했다.

사단은 여기부터다. 너무 조용히 물러났다. 사퇴를 선언한 이사회에서 후임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던 모 전 의원이 바보가 됐다.” 모 정치인의 말이다. “내 후임으로 이 사람이 어떻겠소. 검토해 주시오”했으면 이사회가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란 게 모 구단 사장의 얘기다. 되레 “이사회에서 자율적으로 뽑으라”고 했다. 타당한 행동이었다. 전직 낙하산 총재의 자성처럼 들린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단 지적이다. 신 전 총재는 불쾌했던 모양이다. 올림픽을 전후로 후임으로 모 전 의원이 하마평에 오르는 걸. 같은 YS계열이었다. 그러나 급이 달랐다. 후배였다. 올림픽 이후 사퇴 얘기가 쏙 들어간 것도 후배가 자기 자릴 노린다는 불쾌함 때문이었다는 소문이다.

모 전 의원은 당황스럽다. 교통정리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전임 총재가 자신을 추천하지 않았다. 이사회에선 이름도 거론되지 않았다. 동분서주한 그도 아니었다.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됐다. 바턴을 버린 앞 주자를 바라보는 계주 주자는 또 어떤가.

얘기는 계속된다. 이사회다. 신 전 총재가 물러났다. 이사회는 득달같이 모였다. 삼성 김응용 사장은 연락두절, KIA 조남홍 사장과 히어로즈 이장석 사장은 위임권한. 5개 구단 사장만이 모였다. 조찬 회동을 했다.

‘비정치인 출신 총재 영입’이 목적이라고 알려졌다.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이 야구에 관심이 많고 신망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장이 있다. 그러나 다른 사장은 “신 전 총재 시절  ‘이사회>KBO’로 뒤바뀐 힘의 지형을 계속 유지하길 원한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유 이사장의 낙마를 두고 모 구단 단장은 말했다. “우린 청와대쪽이랑 굉장히 가까운 분인 줄 알았지.”

문화부도 그렇다. 사전 상의가 없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절차를 내세웠다. 그러나 한 푼의 예산지원도 없었다. 승인권한을 주장하는 건 앞뒤가 안 맞다. 프로야구가 생활체육인가. 학원스포츠인가. 야구계와 팬들 사이에 벌써부터 “문화부 소관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입장이 곤란한 건 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태양이 사라진 뒤 어둠이 내릴 때까지의 짧은 순간.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찰나. 그것이 매직아워(The Magic Hour)의 뜻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힘도 자리도 그토록 아름다운 시간도 결국엔 매직아워처럼 짧을 뿐이다.

 

 

 

 

스포츠이데올로기?

 

스포츠라는 프로그램은

'건강한 신체 = 건강한 정신'라는 구호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럴싸한 구호뒤에 검은 얼굴의 아저씨는

 무얼하는 아저씨일까?

 

 20세기초 러시아구성주의 아저씨들은

 운동클럽에 목숨을 걸었다.

 

 그 곳에서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러시아사람들을

 사회주의형 인간들로 새롭게 개조하기위해

 스포츠를 이용했다.

 그것은 히틀러도 레닌도 레이건도 전두환도

 마찬가지였다.

 

 스포츠의 가려진 힘은 무엇일까?

 스포츠와 인간개조의 관계는?  

2008년 12월 21일 일요일

인터뷰매체탐구-MBC RADIO 한국대중음악, 시대를 걷다

  

   

 

   "한국대중음악, 시대를 걷다"는

    위에 있는 사람도 아래에 있는 사람도 아닌

    가운데위치한 대중들을 위한 대중음악의 역사다.

   

    그리고 일상의 시간들의 역사이기에

    소소하게 감동적이다.

 

    한마디로

    부드럽게 슬프고 기쁘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미야자키하야오 & 히사이시조 [컨셉의 일관성]

 

 

 

통통거리며 산을 내려오는 토토로가 귀엽게 느껴졌다면, 소피와 하울이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면, 그것은 음악 덕분이었다고 믿어도 좋다. 존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화면에 딱 달라붙어서 그 장면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 훌륭한 영화음악이라면, 히사이시 조는 정말 훌륭한 영화음악가다. 그의 능력은 <벼랑 위의 포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 4년 만에 한 지브리 작품이다. 이번 음악이 전작과 다른 게 있다면.

정말 행복하게도 미야자키 감독하고는 4년에 한 번꼴로 함께 일을 해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때는 미야자키 감독으로부터 아주 명쾌한 방침을 받았다. “소피라는 여성은 18세부터 90세까지 변화하게 된다. 관객들이 이를 보고 혼란스럽지 않도록 음악은 하나의 메인 테마로 일관했으면 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40곡 정도 되는 곡 가운데 17~18곡은 메인 테마를 편곡한 곡으로 구성했다. 이번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처음에 아주 심플하고 알기 쉬운 메인 테마의 멜로디를 완성했다. 단조로운 멜로디는 리듬이나 하모니가 상당히 복잡한 구성이 되더라도 무난하게 전달된다. 주제가 도입부의 멜로디만 들어도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프레이징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어 어떤 장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굉장히 슬픈 느낌으로도, 굉장히 쾌활한 느낌으로도 편곡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철저하게 바꿔가며 다양성을 주었다. 그리고 <벼랑 위의 포뇨>에서는 3관 편성의 풀 오케스트라에, 혼성 합창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바다를 무대로 한 장대한 판타지로, 엄청나게 풍부한 이미지의 세계가 전개되기 때문에 음악에서도 인상파적인 요소를 조금 쓰려고 했다. 그 결과, 독특한 세계관이 담긴 곡으로 완성되었다.

주제가가 굉장히 중독성이 강하고 귀여운 노래라 한 번 들으면 흥얼거리게 된다.

솔직히, 주제가의 멜로디는 첫 음악 미팅 때 머릿 속에 떠올랐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기가 너무나 머쓱해서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 후 2~3개월 동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처음 그 멜로디가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았다. 2007년 2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피아노로 연주한 데모곡을 가지고 지브리 사무실로 찾아가 미야자키 감독과 스즈키 프로듀서에게 들려줬다. 이러한 순간은 이제껏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정말 긴장된다. 곡이 다 끝났을 때 감독의 얼굴을 보자,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곡으로 갑시다!” 그 후 바로 작사 작업에 들어갔다. 너무나도 심플한 멜로디라서 놀랐을지도 모르겠다.(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고민하지 말고 첫 음악 미팅 때 그 음악을 들려줄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다.(웃음)

주제가에 대해 사전에 미야자키 감독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나?

2006년 가을 <벼랑 위의 포뇨>의 음악과 관련된 첫 미팅에서 미야자키 감독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물론, 어른들도 흥얼거릴 수 있는 곡을 만들어 달라.”   수퍼 일관성

<이웃집 토토로>의 오프닝곡 ‘산책’을 작곡할 때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주인공이 다섯 살 된 남자아이(소스케)와 여자아이(포뇨)다. 이들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좋다’라고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사춘기의 소년 소녀들처럼 여러 가지 복잡한 사고들에 구애받지 않는다. 영화음악은 등장인물의 심정이 동요되고 있을 때 가장 삽입하기 쉽다. 예를 들어 ‘좋아’라고 했을 때, 어떤 느낌으로 좋은 것인지 감정 표현을 위한 효과를 음악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감정은 ‘직구’(直球) 그 자체라서, 전혀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변화보다는 그들이 서로 간절히 원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좋아하려고 하는 ‘기분’과 같은 것을 음악을 통해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등장인물과 화면의 움직임에 음악을 맞추는 방식으로 작업했는지도 모르겠다.

후지오카후지마키(중년 듀오)와 오하시 노조미(아동 극단 소속)가 주제가를 부른 건 의외였다.

스즈키 프로듀서가 먼저 제안했다. 처음에는 좀 놀랐다. 일단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데모를 들었다. ‘프로가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후지오카후지마키 두 명의 중년 남성에게서 소박함이 느껴졌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노래를 잘하지는 못했다는 말과도 같다.(웃음) 하지만, 그들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부르는 느낌의 노래를 제작하는 데 있어 너무나도 잘 부르는 프로 가수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지오카후지마키의 목소리에 녹아 있는 친근함이 좋았다. 물론 불안한 맘도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길이 있을 때,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고 도전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미야자키 감독이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모험의 길을 고집스럽게 가고 싶었다. 나의 이런 결심을 프로듀서에게 전했고, 바로 주제가 편곡 작업에 들어갔다. 폭넓게 사랑받는 스탠더드한 곡으로 만들고 싶어서 기타, 베이스, 드럼, 피아노, 스트링의 아주 전통적인 편성을 택했다. 그리고 <이웃집 토토로>와 같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곡으로 완성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들여 녹음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정말 기분 좋다.

지브리 스튜디오와는 어떤 계기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미야자키 감독과 계속 작업을 해오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이미지 앨범부터 함께 작업을 했다. 그 후로 한 작품 한 작품 정말로 온 힘을 다하여 작곡했던 것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세계적 거장이기 때문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다는 점, 그리고 그 명성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할 때마다 진검 승부를 하는 기분으로 임한다. 데모 곡을 가지고 지브리로 음악 관련 미팅을 하러 갈 때는 정말 매번 수험생이 된 듯한 기분이다. 미야자키 감독과 함께 작업을 계속하게 되는 원동력은, 바로 그가 ‘내 음악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보통 미야자키 감독과는 어떤 식으로 음악 작업을 진행하게 되는가?

<벼랑 위의 포뇨>뿐만 아니라, 미야자키 감독과의 모든 작업은 이미지 앨범 제작부터 시작된다. 이미지 앨범이란, 본편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하기에 앞서 만들어진 ‘스케치 악곡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감독은 이 앨범을 찬찬히 들으면서 스토리를 갈고닦고, 콘티를 그려 나간다.      피드백 = 교감

 

우리 둘이 처음으로 만난 작품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이후로 그 ‘습관’은 바뀌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작업했던 지브리 애니메이션 OST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물론 모든 작품들에 애착이 가지만, 역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미야자키 감독과 처음으로 만나 작업을 한 것이기도 하고, 영화음악으로는 처음 맡게 된 대작이었다. 그 작품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강한 인상이 남는 작품이다.


요즘 아주 바쁘다고 들었다.

영화와 CF, TV 프로그램의 음악을 진행하고 있으며, 연말과 신년에 할 공연을 준비 중이다. 내년 2월에는 솔로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라, 요즘 그 녹음으로 정신이 없다. 아마 한국에서도 그 무렵이면 새로운 솔로 작품을 들을 수 있을 거다.

 

 

 

LEONIDOV께 툭 던지는 질문1

 

 

 

 

 

레오니도프의 건축에 대한 의지는

시대의 프로그램에 대한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질문1 :

FORM과 PROGRAM의 관계를

레오니도프는 어떻게 상정했을까?

 

 

 

 

 

 

 

 

 

 

 

 

 

 

 

 

 

 

밖의 경험은 밖에서 시작한다

 

현대인의 거주방식은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밖과 안의 연결을 위한 요소가 주택의 구성요소에

과감한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작은 요소에 불과하다.

 

주택에서 밖의 경험을 인큐베이팅해서

공공시설에 적용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심하고 현실성없는 것인가?

 

공공시설에서 밖의 경험을 주어서

밖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의 모습

나의 한계를 이해하고

나의 존재를 토닥거려주는 것이

나를 위한 배려라는 것을 안지는 얼마 되지않았다.

 

나의 몸통속 수 많은 영혼들을 끄집어내어

찬바람부는 밖에서 온전히 마주하고 싶었다.

아무말없이 커피한잔과 담배를 그에게 권하고 싶었다.

 

그의 모양새를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모습만큼 살아가고 싶었다.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MADE IN KOREA

MADE IN "?"은 어느 국가에서 무엇을 만들었다는 꼬리표이다.
영토의 경계선은 전세계인을 구별짓는 처음의 유닛이다.

한국은 그 동안(한국의 역사) 무엇을(존재하는 한국의 모든 것) 만들었나?
특히 한국의 근대화과정 동안 남아있는 모든 것이 무엇일까가 궁금하다.

그리고 2000년대의 1/4동안 한국은 어떤자제를 가지고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동시대에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건축가는 일본을 미국건축가보다 잘 설명하며 중국건축가는 중국의 건축을 독일건축가보다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건축가는 한국건축을 프랑스건축가보다 잘 나타낼 수 있다.

그리고 '건축가'라 함은 한국의 보편적인 건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세계건축가의 테두리안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것일 뿐 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한국의 건축은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사이다.
그들이 가장 보편적인 한국사람들을 건축주로써 많이 상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은 한국건축에서의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대중건축)의 특징을 날카롭게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 특징들을 잡아낸후 그것을 숭고하게 설계하여 보편성을 특수성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 특징은 형태나 공간뿐만이 아니다. 건축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유형과 무형의 모든 것이 골고루 중요하며 미리 짐작해보자면 사실 무형의 조건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의 고결한 정신과 값싼 정신 모두를 품어야 한다.
값싼 정신은 많은 한국사람들이 공감하는 진정한 정신이다. 그러나 그 저렴한 정신을 다시 높은 위치에 고결하게 올려놓을 수 있을 때 한국건축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숭고한 정신만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숭고한 정신도 결국 값싼 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기다림 - 사랑의 단상

 

Fragment d'un discours amoureux

Roland Barthes

 

 


기다림(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
짐(약속 시간, 전화, 편지, 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
이.

여기 기다림의 한 무대 장식술이 있다.나는 그것을 조직하고 조작한
다. 시간을 쪼개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흉내내며, 조그만 장례의
모든 효과를 유발하려 한다. 그것은 연극각본처럼 무대에 올려질 수
있다.

무대는 어느 찻집 안.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고 그래서 난 기다린다.
'서막'에서 그 유일한 배우인 나는(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 그 사
람의 늦어짐을 확인하고 기록한다.

이 늦어짐은 아직은 수학적인, 계산할 수 있는 실체에 불과하다(나는
시계를 여러 번 들여다본다). 이 서막은 하나의 충동적인 생각으로 막
을 내린다. 즉 나는 '걱정하기로' 결심하고 기다림의 고뇌를 터뜨린다.
그러면 제 1막이 시작된다.

그것은 일련의 가정으로 채워진다. 만날 시간이나 장소에 어떤 오해
가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순간의 모든 구체적인 사
항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쓴다. 어떻게 해야할까(처신의 고민?)

다른 찻집으로 가볼까? 전화를 해볼까? 하지만 만약 내가 자리를 비
운 사이에 그가 나타난다면? 내가 안 보이면 가버릴지도 몰라 등등.
제2막은 분노의 막이다. 나는 부재하는 그 사람을 향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그래도 그이/그녀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이/그녀에게
안왔다고 나무랄 수 있게 그이/그녀가 지금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3막에서의 나는 버려짐의 고뇌라는 아주 순수한 고뇌에 이른다(또는
획득한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진다.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장례의 폭발.

내 마음은 '창백하다'(livide).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연극이다. 이 연
극은 그 사람의 도착으로 좀더 짧아질 수도 있다. 그가 만약 1막에서
도착한다면, 나는 그를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고, 2막에서 도착한다면,
"한바탕 언쟁이 벌어질 것이며," 3막에서 도착한다면 오히려 감사해할
것이다.

마치 펠레아스가 지하동굴에서 나와 삶을 되찾았던 것처럼, 나는 깊
숙이 장미 내음을 들이마실 것이다.(기다림의 고뇌가 계속 격렬한 것
만은 아니다. 침울한 순간도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고, 내 기다림을
둘러싼 것은 모두 비현실적인 것으로 휩싸인 듯하다. 이 찻집에서 나
는 들어오고, 수다떨고, 농담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을 바라다본다. 그들,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다. 젖먹이 아이에게서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그를 끊임없이 만
들어내고 또 만들어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그를 만들어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착란이다. 전화가 또 울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그는 내게 전화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알아보는"듯하고 그래
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방꾼에
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을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
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 순간에는 모두 그 사람으로 '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
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
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
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
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기다림(58-62p.)

 

 

 

 

 

 

 


 

Fragment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의 단상

 

 

 

이 책의 필요성은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담론(discours)은 아마도
수많은 주체들에(누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의해 말해져왔을 것
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보호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주변의
언어들로부터 버림받았다. 또는 무시되고 헐뜯어지고, 웃음거리가 되어
왔다."

"권력에서 단절되었을 뿐 아니라, 그 메커니즘(과학, 지식, 예술)과도
단절된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담론이 모든 군생 집단 밖으로 추방당
하여 스스로의 힘에 의해 비실제적인 것 안으로 표류하게 되면, 그때
는 그것은 긍정의 장소가-비록 미미한 것이긴 하지만-되는 수밖에 없
다. 요컨대 이 긍정은 바로 여기 시작하는 책의 주체이기도 하다."

 

 

 

 

책제목: 사랑의 단상(Fragment d'un discours amoureux. 1977).
저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역자: 김희영.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출판년도: 1991. 12. 20.
책 가격: 8000원.
총 분량: 322쪽.

감추기 -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사랑의 단상

Roland Barthes

 

 

감추기(cacher):

심의적(deliberatif)인 문형.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해야 할지 어떨지를 자문하는 게 아니라(이
것은 고백의 문형이 아니다), 그의 정념의 혼란을(그 소용돌이를) 어느
정도로 감추어야 할지를 자문한다. 그 욕망, 그 절망감, 그 지나침(라신
의 용어로 광란fureur이라는 것)을.


X가 나를 두고 바캉스를 떠나더니 전혀 소식이 없다. 무슨 사고가 일
어난 걸까? 우체국이 파업중일까? 아니면 무관심, 거리감을 두려는 전
략, 순간적인 충동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그는 젊음에
취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또는 단순히 아무 일도 아닌 걸까?

나는 점점 더 괴로워하며 기다림이란 시나리오의 모든 막을 거친다.
하지만 X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서 다시 나타난다면(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물론 이 생각은 모든 고뇌를 즉시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
겠지만),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내 혼란을(그때는 이미 끝난) 감춰야 할까?("좀 어떠세요?")아니면 그
것을 공격적으로("그 처사는 옳지 못했어요. 당신은 ~할 수도있었을 텐
데") 또는 열정적으로("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터뜨려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람을 진력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 혼란을 넌지시 슬쩍
비춰야만 할까("좀 불안했어요")? 내 첫번째 고뇌에다 어떤 선전 문구
를 택해야 할까 하는 두번째 고뇌가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이중의 담론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
이 그 고유의 구조적 성향으로 인해 나의 간청을 필요로 한다면, 내 '
정념(passion)'의 서정적 진술에, 문자 그대로의 표현에 자신을 내맡기
는 게 나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닐까? 지나침, 광기, 그것이 내 진실이
며 힘이 아닐까? 그리고 이 진실, 이 힘이 결국에 가서는 그를 감동시
키는 게 아닐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정념의 기호들이 그를 질
식시킬지도 몰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바 로 내 가 그 를 사 랑 하 기 때 문 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를 이중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때로는 대상으로, 때로는 주체로. 나는 독재와 봉헌 사이에
서 망설이며, 그렇게 하여 자신을 공갈협박 속으로 몰아넣는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기를 바랄 의무가 있고, 그
러나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함정이다. 나는 성
인이 되거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인은 될 수 없고, 괴물
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얼버무린다. 나는 내 정념을 조
금 만 보여준다.

내 정념에 신중함(태연함)의 가면을 씌우는 것, 바로 거기에 진짜 영웅
적인 가치가 있다.
"고매한 영혼들은 자신이 느끼는 혼란을 주변에 퍼
뜨려서는 안 된다."(클로틸드 드 보).

발자크 소설의 주인공인 파즈 대위는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을 죽도
록 사랑하나, 그 사실을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마치 자기에게 정부
가 있다는 듯 꾸며댄다. 그렇지만 정념을(다만 그 지나침을) 완전히 감
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추는 것이 보여져야만 한다.

"내 가 당 신 에 게 뭔 가 감 추 는 중 이 라 는 걸 좀 아 세
요"

이것이 지금 내가 해결해야 하는 능동적인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동
시에, 알려져야 하고 또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것
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만 한다. 내가 보내
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라르바투스 프로데오(Larvatus prodeo)-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내 정념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나,
또한 은밀한(엉큼한) 손길로 이 가면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정념은 결
국에 가서는 그 관객을 가지게 마련이다. 죽기 바로 직전 파즈 대위는
그가 침묵 속에서 사랑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겼다.
마지막 극적 사건이 없는 사랑의 봉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는
항상 승리자이다.

그 사람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울었다고 가정해
보자(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랑하는 육체의 정상적인 활동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안 보이려고 내 뿌예진[이것은 부인(부인)의 좋은 사
례이다. 보이지 않으려고 시선을 흐리게 하는 것] 눈에 검은 안경을 썼
다고 하자.

이 몸짓의 의도는 계산된 것이다. 나는 모순된 동시에, 금욕주의적인
'의젓함'의 그 도덕적 이득을 취하려 하며(나는 자신을 클로틸드 드
보로 간주한다), 또 그의 다정한 질문("무슨 일이오?")을 유발하고자
한다.

나는 가련한 동시에 감탄할 만한, 아이이자 어른이고 싶어한다. 그러
나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일종의 도박을 하는 셈이며, 자신을 위태롭
게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 별난 안경에 대해 전혀 물어보지 않
을 수도, 또 그 사실에서 어떤 기호도 알아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
이다.


나는 내 감정의 지나침을 결코 말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고뇌의
침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나는, 그러므로 그 고뇌가 지나가
면,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안심할 수가 있다. 언어
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특히 말 하 지 않
는 것 조 차 도.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육 체
로 는 그 렇 게 할 수 없 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육체는 말해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육체는 조종할 수 없다
.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
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육체는
고집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

이렇게 하여 일련의 긴 언술적인 긴장이("나의 예의바름이") 갑자기
일반적인 증세로 폭발할수도 있다. 그 사람의 어리둥절해 하는 시선
앞에서 별안간 울음이 터져나와(예를 들면), 오랫동안 감시해왔던 언어
의 노력을(그리고 그 효과를) 무산시켜 버린다. 나는 무너진다. 그렇다
면 너는 페드르가 누구인지 그녀의 광란이 어더한지 모두 알아두어라.

#검은 안경(63-67.p)

 

 

롤랑 바르트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결혼식 징크스-2

 

 

 

 

못난 친구

 

내 삶의 고비에  

짜증을 내며

끊임없이 함께 해준

친구

 

언젠가부터 나와 삶의 가치가

달라져서 자주 보진 못했지만

 

그가 기쁠때나 내가 힘들때면

항상 만나고 싶은 친구다.

또 내가 그에게

미안함 마음이 가득한 친구다.

 

 

 

 

결혼축사

 

그 넘이 드디어 넘어야 할 선을 넘었다.

 

그 선이 그어지는 날

나는 그 선에 대한 찬사를 했다.

 

진정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내 심정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었고

그것을 우린 축사라고 간단하게 불렀다.

 

 

 

 

진심

 

간만에 많은 사람들앞에 선 자리이기에

그 자리에 서기전까지

많이 떨렸지만

 

신랑신부와 축하객들앞에 서서

마이크로 내 이름을 말하고

그 편안한 내 목소리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겼고

심지어 BGM으로 아름다운 피아노소리때문에

더욱 업되었다.

 

진심을 말하는 자리기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떨리지 않았다.

그래서 축하객들도 나의 마음을 편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종이한장

 

인생은 종이 한장 차이다.

 

난 결혼식에 20분이나 지각을 했고

친구와 친구의 가족(부모님같은 분이다)들에게

평생 개새끼가 될 뻔했다.

 

하지만 간반에 차이로 결혼식장에 도착했고

많은 사람들의 크고 사소한 도움

(허주현 - 축사를 자문해주신

 아버지 - 한강이라는 단어를 보태주신

 윤철 - 축사대기자리를 맡아주신

 승? - 내 코트를 잠시 맡아주신....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덕분에 신랑신부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었다.

 

그 종이는 이번에 "시간"이었고

종이의 종류는 매번 바뀐다.

 

 

 

 

징크스

 

결혼축사사건은 나의 결혼징크스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그리고 얻은 것이 너무 많다.

진심을 드러내는 것의 아름다움(진심은 방망이질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진심이 없는 대상에게 진심처럼 보일 순 없다는 당연함(나에게 있어서)

문어체와 구어체의 엄청난 틈

퇴고의 필요성

글쓰기의 정신적 효과

내 목소리의 자신감

주현이에대한 고마움

 

 

 

이 죽일 놈의 시간개념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나의 특이한 시간개념에 대한 반성이다.

즐겁고 힘들게 이어온 오랜 마음들을

한방에 보내버릴 만한 나의 시간개념.

 

 

 

 

 

 

2008년 12월 1일 월요일

콩쿠르는

 

 

 

 

“콩쿠르는 본인에게도 스승에게도 굉장히 지겹고 힘든 과정이지만

 

현재로서는 우리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콩쿠르밖에 없기

 

 

때문에 집중하고 있다”

 

 

 

                                                                                                   

 

 

                                                                                               - 신현수를 지도한 김남윤 교수 -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8/11/25/200811250167.asp